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낭트 칙령 (문단 편집) == 폐지 == 하지만, 약 1세기 후인 [[1685년]] 10월 18일에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에 대한 [[교황]]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폐지하였다. 이는 며칠 후인 10월 22일 퐁텐블로 칙령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앞선 [[루이 13세]] 시절부터, 위그노들은 기존의 사회중심인 가톨릭 질서에 도전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위한 수차례의 반란, 적지 않은 규모의 폭동을 부채질하는 등, 각종 사회불화를 일으키는 사건으로 이미 자신들의 여러 요새를 무기화 했다가 파괴당하고 탄압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위그노의 신변 보장을 위해 독자적인 은행업, 무기소유권, 요새건설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게 변질되어 프랑스의 각종 불순분자나 반란세력들은 상당한 거물급 반역자부터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세력 확장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지닌 위그노들에게 의탁하여 그들의 무기와 자산을 받고 위그노의 요새와 함선에 숨어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이유는 이 불순분자들이 작위 및 재산 계승 과정에서 프랑스 가톨릭의 보수파들한테서 힘을 빌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685년부터 1698년까지 20~30만 명의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잉글랜드 왕국]], [[북아메리카]] 식민지 등으로 이주하였다. 특히 많은 수학자, 과학자[*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도 [[위그노]] 이주민 출신이며, 현재 [[스위스 시계]] 산업의 중심지가 [[제네바]], [[뇌샤텔]] 등 [[스위스]] 서부의 [[프랑스어]]권 지역인 것도 이 사건의 여파다.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던 [[위그노]] 시계공들이 같은 [[프랑스어]]를 쓰는 데다 [[칼뱅|지배자 역시 개신교도]]인 이 지역으로 집단으로 이주했기 때문. [[프랑스]] 입장에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산업 단위로 놓친 셈. 훗날 프랑스 궁정에서 활동한 [[Jaquet Droz|피에르 자케 드로]], [[Breguet|브레게]] 같은 [[캐비노티에|시계 장인]]들도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 사람이었다.], 상공업자들이 이주한 것은 한동안 프랑스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스위스의 시계산업은 이때 생겨나난다. 물론, 과학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과학자들도 많았고 프랑스 역시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지에서 쫓겨나는 가톨릭 상공업자들을 열심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일방적인 손해는 아니었다.[* 과학이나 기술 발전은 돈이 많이 필요하기에, 당시는 가톨릭 수도회나 성당에서 과학 발전을 주도하는 시대였다. 프랑스의 과학은 이후에도 계속 발전했으며 이 사건으로 잃은 것은 시계 산업 정도. 물론 이 당시의 시계 산업은 현재의 3D 프린터 급으로 최신 기술이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사태가 악화되었는지, 구교와의 악연 뿐만 아니라 본래의 가르침과는 달리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 시작한 위그노들이 프랑스 사회에서 일으킨 불화와 반란에 관해서는 [[위그노]] 항목 참조. 프랑스에 남은 위그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지하교회로 숨어들었고 이후 프랑스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은 또다시 1세기 후인 [[루이 16세]] 치세인 1787년의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